국권(國權)을 빼앗겼다고 해서 민족의 패망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을사조약 이래로 경술국치를 겪는 동안, 그리고 8.15해방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한국인들은 왜세와 대항하여 붓으로, 칼로, 몸으로 싸웠다. 안명근도 바로 이와같이 위난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왜제에 항거했던 인물이지만, 일찍이 그의 사촌형 안중근 역시 <이토오>를 처단함으로써 그의 집안이 항일에의 전통적 가문임을 입증시킨 바 있다.

안명근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별로 전하여 오지 않지만, 근세 개항을 전후하여 불의에 대항하고 외세에 도전했던 인물들이 황해도 신천(信川)지방에서 다산(多産)되었던 사실로 미루어 보면 그의 반골(反骨) 정신은 그 가문과 함께 일찍이 단군이 도읍한 아사달(阿斯達)의 위치라고 전해지는 영산(靈山)이며 또 구국항일의 본거지로서 유서깊은 구월산(九月山) 남단에 자리잡은 <신천>이라는 풍토적 영향권 하에서 이루어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백범일지>에 보면 안명근의 부대(父代)의 형편을 알 수 있거니와 즉 다음과 같이 적혀 있는 것이다.

<안진사(안진사.안중근의 父)는 과거를 하려고 서울 김종한(金宗漢)의 문객이 되어 다년 유경(留京)하다가 진사가 되고는 벼슬할 뜻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형제 6사람이 술과 시로 세월을 보내고 뜻있는 벗을 사귀는 것으로 낙을 삼고 있었다. 안씨 6형제가 다 문장재사라 할 만하지만 그 중에도 셋째인 안진사가 눈에 정기가 있어 사람을 누르는 힘이 있고, 기상이 뇌락하여 비록 조정의 대관이라도 그와 면대하면 자연 외경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이로써 그가 황해도 신천 땅에서 비록 재산은 많지 않더라도 꿋꿋한 선비 집안의 후손임을 알 수 있고, 그의 삼촌(안중근의 父)인 안진사의 훈도하에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성장하면서 터득했으리라 믿어지는 소이연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일찍이 안명근은 종형 중근(重根)의 사상에 깊은 감화를 받고 독립운동에 자기의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했으며, 김구, 이승훈등의 민족지사들과도 교유를 가진 바 있었다. 그러던중 1909년 10월 안중근이 하르빈 역두에서 <이토오>를 암살하게 되면서 <민족이 망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렬히 표현하게 되었지만, 이로부터 왜제의 탄압으로 말미암아 민족운동은 정중동(靜中動)의 모색을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안중근의 집안에 대한 탄압과 감시는 비길 데 없이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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