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挫折) 대신에 비젼을

이제 민족의 선각자 안창호를 부각해 봄에 있어 다음 세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즉 첫째는 그의 인간상을 부각하고, 둘째는 그의 생애를 논하고, 끝으로 그의 사상을 규명해 보려는 것이다.

첫째, 그의 인간상은 두 측면에서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정치가로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60평생을 혁명의 재단 앞에 바친 애국적 지사로서의 안창호요, 또 하나는 교육자로서의 안창호이다. 즉 사(思). 言(언). 행(行)에 있어서 모든 사람의 이상적 본보기가 된 수양인으로서의 안창호다. 그 어느 경우에서나 안창호는 우리의 지표요, 민족의 위대한 본보기였던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서 애국적 정치가의 이상적 타입을 발견하는 동시에 지성으로 일관된 수양인과 교육자로서의 완전한 귀감을 또한 찾아볼 수 있는 바, 먼저 민족독립운동에 온 신명을 바친 혁명적 정치가로서의 안창호의 면모와 특색을 살펴보자.

한말(韓末) 이후 일제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는 많은 선각적 인물이 배출되었다. 한국 근대화의 선봉이된 서재필(徐載弼)을 비롯하여 청년지도에 공로가 큰 월남(月南) 이상재,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오산학교를 창립한 남강(南岡) 이승훈, 한국의 <간디> 라고 일컫는 고당(古堂) 조만식과 그리고 문화사업에 힘쓴 인촌(仁村) 김성수, 내 글을 지킨 한글학자 이윤재, 또 무력투쟁으로 항일 운동을 전개한 의병과 혁명가들, 실로 많은 인사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풍운의 시대는 인물을 많이 낳는다고 한다. 그러나 한말의 여러 인물 중의 한 사람인 안창호는 다른 여러 인물들과 비견하건데 다음 세가지점에서 분명히 달랐다.

그에게는 확고한 사상이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확고 부동한 민족 경륜의 사상이 있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나라를 구할 수 있고 독립과 번영을 쟁취할 수 있는가 하는 구국(救國)의 이론과 방략이 뚜렷하였다.

그는 감정적 흥분이나 비분강개하기에 앞서서 구국의 이론과 방법을 냉철히 연구하고 계획하고 창조해 내는 명철한 철학적 사색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구국의 철학은 무실력행주의(務實力行主義)에 의한 민족개조(民族改造)사상이요, 인격혁명(人格革命)과 자아혁신(自我革新)을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흥사운동(興士運動)이었다.

안창호는 이러한 민족경륜의 사상과 구국의 이론과 방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난 속에서도 결코 실망하지 않았고 시련 속에서도 절대로 낙심하지 않았다.

안창호는 그의 마지막날까지 불사조의 신념과 의지를 가지고 민족정신의 수호자요, 화신으로서 줄기찬 항일투쟁의 생애를 마쳤으니, 이는 그에게 요지부동한 구국의 사상과 이를 뒷받침하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는 실망 속에 빠진 동지들에게 언제나 밝은 희망을 주었고 방향을 상실한 국민에게 명확한 <비젼>을 던질 수 있었던 것도 오로지 그에게 확고한 민족경륜과 구국 이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도자는 사상이 있어야 하고 신념과 비젼을 가져야한다. 이런 점에서 안창호는 자기의 사상과 신념과 비젼을 가졌고, 위대하고 명철한 민족 경륜의 철학을 아울러 갖춘 지도자였다. 최근 1세기에 걸친 우리나라의 애국적 지도자 중에서 안창호는 자기의 확고한 사상을 가장 뚜렷이 간직한 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그도 흥사단의 국내조직체인 수양동우회의 동지들과 함께 다시 투옥되었다. 그러나 윗병과 간장병으로 보석 출감되어 서울대학병원에서 입원 치료하던 중 61세로 운명하였다. 이리하여 민족의 거성인 안창호는 갔다.

지사로서, 혁명가로서, 교육자로서, 수양인으로서의 그가 남겨놓은 업적은 영구히 그 빛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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