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대부(嘉靖大夫.종2품) 예문관(藝文館.임금의 칙령(剌命)과 교명(敎命)을 기록하던곳) 대제학(大提學.고려 때엔 종2품 이조에서는 정2품) 의정부(議政府.최고기관, 백사(百司)를 맡아보던 최고행정관) 좌참찬(左參贊.정2품)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 증시(贈諡) 문숙공(文肅公) 옹재(雍齋) 先生 신도비명(神道碑銘.고려때는 정3품 이조때는 정2품이상 관원의 무덤 동남방의 남향으로 세운비)

죽계안씨(安氏)의 어질고 현달한 분은 諱 축(軸)이시니 고려조에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한) 도첨의부(都僉議府.서정을 총괄하던 고려때 관청임) 찬성사(贊成事.종1품관) 시(諡) 문정(文貞)이시다.

사람들이 지금도 근재선생(謹齋先生)이라 칭하며 근재(謹齋)가 諱 종원(宗源)을 낳으시고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고려말 李朝初 서정을 총괄하던 기관의 정1품관)를 지내시고 세상을 떠나시매 시호를 문간(文簡)이라 하였다.

문간공(文簡公)이 諱 경공(景恭)을 낳으시니 아태조(我太祖.이성계를 가리킴)가 개국(開國)하여 공신(功臣)이 되시고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으로 封해졌으며 시호(諡號)는 양도(良度)요 양도공(良度公)께서 휘 순(純)을 낳으시니 관(官)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중추원의 종1품관)요 시호는 정숙(靖肅)이시다.

근재(謹齋)로부터 世世로 유(儒)孔.孟子之 학문을 이어왔으며 명신(名臣)이 되시고 문벌이 혁혁하여 더 말할 나위가 없더라. 정숙공(靖肅公)이 청원군(淸原君)이며 문간(文簡). 시호를 받은 정공권(鄭公權.良度公 神道碑 註36 참조)의 따님에게 성취(成娶)하여 네 아드님을 낳으셨으며 公은 둘째이시다.

諱는 숭선(崇善)이요 字는 중지(仲止)이고 옹재(雍齋)는 그의 호(號)이다. 洪武25년 임신(壬申) 9月 甲申(西紀 1392年 이태조 元年)에 나시어 영락(永樂) 9年(서기 1411년 公의 나이 20세) 辛卯에 公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음직(蔭職.조상의 공덕으로 벼슬하는 것)으로 계승전직(啓聖殿直)으로 있다가 여러번 벼슬이 옮겨져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사헌부는 백관 기강확립 기관이며 감찰은 정6품)에 이르셨다.

이 때 영남(嶺南) 수령들이 백성을 불법으로 괴롭히는자가 많거늘 公을 어사(御史)로 삼으니 오래지 않아 그실정을 알아내니 이는 무술년(戊戌年)에 있었던 일이다. 2년후인 경자년(庚子年)에 허(許) 문경공(文敬公) 조(稠)가 시험관이 되어 과시(科試)를 실시하니 공이 장원 급제하였고 사헌 지평(司憲 持平.종 5품관)을 배(拜)하셨고 그 이듬해에 예조정랑(禮曹正郞.정5품관)으로 옮기고 또 이조(吏曹) 지제교(知製敎.왕의 교서등을 지어서 바치는 직책)로 옮겼고 이로부터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직책을 맡았다. 때에 정랑(正郞)이나 시랑(侍郞)등 벼슬은 한달 또는 두달만에 갈리고 오래있는 者라야 불과 半年일러니 公은 어질다 하여 3年이나 이조(吏曹)의 관리로 재임하다가 갑진년(甲辰年)에 경기감사의 보좌관으로 있다가 홍희원년(洪熙元年) 乙巳에 한성소윤(漢城少尹.정4품관)으로 임명되었다. 때에 공은 끊고 맺음이 분명하고 물 흐르듯 다스리니 부중(府中)이 탄복하였다.

선덕(宣德) 원년(元年1426년 세종8년) 병오(丙午)에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종3품관)으로 전임되었으나 이언(以言)으로 성균사예(成均司藝.정4품관)로 좌천되었다가 모든 일이 밝혀져 집의(執義.사헌부 종3품관)로 발탁되었다가 이번에는 파직되었다.

己酉年(1429년 세종 11년)에 국가가 중국(中國)에 금은(金銀)을 공납(貢納)하는 것을 면제해 줄 것을 청하기 위해 종친(宗親.왕의 가까운 친척)인 공녕군(恭寧君) 인(姻)을 중국에 보내기로 하였으나 나이가 어려서 이름높은 학자를 선택하여 서장관(書狀官.중국에 사신을 보낼 때 정사(正使)와 부사(副使)와 서장관(書狀官)이란 이름의 기록관(記錄官)을 보냈다)을 삼아 보내기로 하고 공을 대호군(大護軍.종3품관)으로 가게 하였던 바 청(請)이 받아들여져 돌아오니 上께서 전토(田土)를 하사(下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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