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충익대(推忠翊戴) 개국공신(開國功臣) 보국(輔國) 숭록대부(崇錄大夫) 영삼사사(領三司事)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 증시(贈諡) 양도공(良度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문도공(文度公) 청경(淸卿) 윤회(尹淮)

안씨지선(安氏之先)은 순흥의 망족(望族)이니 公의 휘(諱)는 경공(景恭)이요 字는 손보(遜甫)니 일찍이 가정교훈을 받아 사치스러운 습관이 없고 온량하고 효제함이 천성의 근본이라 至正 25年 을사(乙巳)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홍무(洪武) 5年 임자(壬子)에 正8品인 산원(散員)이 되고 이듬해에 正6品인 낭장(郞將)을 초배(超拜)하였고 사헌규정(司憲糾正)을 겸하고 병진년(丙辰年)에 의영고부사(義盈庫副使)로서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전리전법좌랑(典理典法佐郞) 사헌지평(司憲持平)을 지내고 예의정랑(禮儀正郞)으로 다섯번 전임하여 삼사좌윤(三司左尹)에 이르고 상호군(上護軍) 겸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 진현관(進賢館) 제학(提學)을 제수받고 얼마후 판전교사사(判典校寺事) 지제교(知製敎), 판서(判書), 예의(禮儀)로 개임되고 전법(典法)으로 옮기니 형정(刑政)을 시행(施行)함에 조심하는바 많더라.

황주(黃州)로 출목(出牧)할새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고 은혜를 베푸니 백성들이 사모하였으며 임신(壬申)4月에 밀직(密直)으로 들어와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고 7月에 아태조(我太祖)가 운명에 따라 혁명(革命)하니 공이 역수(曆數)의 돌아감이 있음을 알고 재상과 장군들과 더불어 추대하여 좌대언(左代言)에 나아가 드디어 익대개국공신(翊戴開國功臣) 중추도승지(中樞都承旨)를 拜하였다.

이때는 아직 새로운 제도가 마련되지 못하여 나라가 무질서한 어려운 때라 공이 핵심적인 지위에서 밝고 성실하게 출납하면서 비밀된 회의를 옳게 주관함으로서 비익(裨益)함이 크고 많았다. 계유(癸酉)에 대사헌(大司憲) 도평의사사(都評議使)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에 올랐다.

公이 두번이나 오대(烏臺)에 入하되 바름을 지켜 흔들리지 않고 풍채가 엄숙하였다. 갑술(甲戌)에 문간공(文簡公)의 상을 당하고 복을 마치매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흥녕군(興寧君)을 봉(封)하고 공훈(功勳)이 크사 관직을 전과 같이 하였으며 영락(永樂) 4年 병술(丙戌)에 판공안부(判恭安府)로 위계(位階)가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오르고 옮겨 판한성부(判漢城府)하고 위계(位階)를 재차 더하여 숭정(崇政)이 되었다.

무자(戊子)에 내간(內艱)을 당하여 약이(藥餌)의 봉양과 상장지례(喪葬之禮)를 성효(誠孝)로서 극진하게 하니 보는 사람마다 경앙(敬仰)하였다.

경인년(庚寅年)에 태종(太宗)이 송도(松都)에 행행(幸行)할새 公을 명하여 유후개성(留後開城)하고 특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제수하고 부원군(府院君)으로 진작(進爵)하였다.

公이 조정에서 직(職)마다 여러가지로 깊이 염려하여 모든 일을 처리하였다. 대신(大臣)이 되어 무게있게 일을 처리함으로써 조정에 의표(儀表)가 되었다. 일찍이 경상도 안렴사(按廉使)를 지내고 전라(全羅) 황해(黃海)의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덕화(德化)를 베풀고 강(强)을 바로 잡고 약(弱)을 세우며 너그럽고 일 처리가 간략하여 까다롭지 않게 부내(部內)를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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