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국(高麗國)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 아조(我朝) 특진(特進) 보국(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판문부사(判門下事) 집현전(集賢殿) 태학사(太學士) 증시(贈諡) 문간공(文簡公) 호(號) 쌍청당(雙淸堂) 선생 묘비명(墓碑銘)

公의 휘(諱)는 종원(宗源)이요 字는 사청(嗣淸)이요 성은 안씨(安氏)니 순흥부 사람이라. 고(考)는 축(軸)이요 호(號)는 근재(謹齋)이니 원조과거(元朝科擧)에 급제(及第)하고 고려조에 재상이 되어 도첨의(都僉議) 찬성사(贊成事)가 되시고 졸(卒)하심에 시호(諡號)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다.

일찍이 관동(關東)에 존무사(存撫使)로 있을때 관동와주집(關東瓦注集)을 지어 세상(世上)에 내놓았다. 조부(祖父)의 휘는 석(碩)이니 급제(及第)하였고 증조부(曾祖父)의 휘(諱)는 희서니 본부호장(本府戶長)이요 누대(累代)에 걸쳐 크게 떨치지 못하다가 마침내 경사스럽게 되었으니 문정공(文貞公)께서 역학기가(力學起家)하사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다. 감천군부인(甘泉郡夫人) 문씨(文氏)를 취(娶)하였으니 검교(檢校) 군기감(軍器監) 구(龜)의 따님이시라.

태정(泰定) 을축(乙丑) 계유(癸酉)에 公을 낳으시니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왔으며 점점 장성하여 독서(讀書)를 하기에 이르러 희롱을 일삼지 않고 행동거지가 뭇 아이들과 다르니 식자(識者)들이 그가 반드시 귀하게 될줄 알더라. 至正 신사(辛巳年)에 公의 나이 17歲일으니 금좌사(金左史) 광재(光載)가 성균(成均)에 시험을 보이고 이시중(李侍中) 암()과 정찬성(鄭贊成) 을보(乙輔)가 시관이 되니 公이 한번에 연중(聯中) 선발이 되었다.

임오년(壬午年)에 교감(校勘)을 지내고 을유년(乙酉年)에 뽑혀 예문(藝文) 춘추관(春秋館) 양쪽의 검열(檢閱)로 들어갔다. 구거(舊居)하던 양관(館)의 사람들의 규률이 소홀하더니 公이 예법(禮法)으로 다스려 관중(館中) 사람들이 숙연하였다. 병술년(丙戌年)에 두번 수찬(修撰)을 더하고 임기가 만기(滿期)가 되었을 때 동료(同僚) 심동로(沈東老)가 연고(年高)하면서도 위하(位下)이거늘 公이 양보하여 그를 천(遷)케 하자 문정공(文貞公)께서 들으시고 기뻐하여 曰 사양은 덕지선(德之先)이니 내가 타인(他人)에게 사양하면 사람들 중 뉘 나를 버리랴 우리집에 사람이 있으니 자못 더 창성할진저 하셨다.

그 후 1年이 지나 삼사도사(三司都事)를 배(拜)하니 이로부터 부사(副使)와 유비창승(有備倉丞) 사복령(司僕令) 공조(供造)로 천질(遷秩)되니 거(居)하는 곳마다 직책에 맞추어 기리는 소문이 더욱 퍼졌다. 신묘년(辛卯年)에 공민왕이 책립되사 도관좌랑(都官佐郞)을 제수받고 임진(壬辰)에 군부(軍簿)에 전임되고 계사(癸巳)에 전법정랑(典法正郞)일으니 전민형소(田民刑訴)가 다 전법(典法)에 모인지라 공이 재결(裁決)해서 판결함이 공평하니 사람들이 그 밝은 판결을 칭송하였다.

  

 

 

Copyright ⓒ2004  순흥안씨삼파종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