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장사랑(元朝將仕郞) 요양로(遼陽路) 개주판관(蓋州判官) 고려국삼중대광(高麗國三重大匡) 도첨(都僉)의 찬성사(贊成事)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 영예문관사(領藝文館事) 증시(贈諡) 문정공(文貞公) 근재선생(謹齋先生) 묘지  

문효공 가정 이곡(墓誌 文孝公 稼亭 李穀)

내가 원나라 서울에 있을 때 근재(謹齋)의 병환 소식을 들었으며, 이제 문병을 하였던바 나를 보시고 잠연(潛然)히 눈물지어 말씀하시되 내가 이 세상에 오래 살지못하리라 하시고 그의 자 종원(宗源)을 가리키며 말씀하시되 그대는 오아(吾我)를 잊지 말라 하시고 또 묘지(墓誌)를 써주기를 부탁하시면서 가로되 내 평생(平生)에 가(可)히 일컬을 것은 없으나 네 번 사사(士師)가 되어 일반 백성들중 억울하게 종이 된 자를 옳게 다스려 양민(良民)으로 삼은바가 있으니 이는 가히 기록할지니라 하시거늘 내가 듣고 슬퍼 가로되 어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병환이 어찌 회복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였거늘 오호라 가위(可謂) 지명군자(知命君子)이셨는데 슬프도다 이미 卒하사 나와 동년(同年)인 公의 아우 보가 비문(碑文)을 청하니 아아 내가 일찍 공에게 학문을 배웠고 공이 친히 생전에 당부하신 바 있거늘 어찌 감히 사양하리오.

공의 휘(諱)는 축(軸)이요 자는 당지(當之)니 흥녕인(興寧人)이라 증조 득재(得財) 조는 희서(希서) 두분 다 본군 호장(戶長)이요 고(考)의 휘(諱)는 석(碩)이시니 급제하시고도 벼슬에 나가지 않으셨으나 공의 연고로 다 관작을 추증(追贈)받으시니라.

어머님은 흥녕군 대부인 안씨(興寧郡 大夫人 安氏)니 본군인(本郡人)인 검교 군기감 성기(檢校 軍器監 成器)의 따님이시라. 공이 나서부터 영특하사 책을 읽어 깨달으시며 학문을 깊이 닦아 성균(成均) 시험에 합격하사 진사(進士)에 뽑히시고 금주사록(金州司錄)으로 있으시다가 예문관(藝文館) 춘추관 검열(春秋館 檢閱 正9品官), 수찬(修撰.正6品官)에 선임되시고 재차 향시에 합격하사 사헌규정(司憲糾正.正六品官)을 배(拜)하셨고 계해(癸亥)년에 또 향시에 제1로 합격 하시고 갑자년(甲子年)에는 원(元)나라 과시(科試)에 제3갑(第三甲)으로 칠인중(七人中) 한 사람으로 뽑히시어 칙명(勅命.天子의 命)으로 개주판관(蓋州判官)을 제수 받으셨다(부임은 않으셨음.)

때에 충숙왕(忠肅王)이 원(元)에 끌려가서 억류된지 4년이라 공이 동지(同志)들에게 이르시되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죽나니 우리는 이렇게 배웠노라 하시고 상서(上書)하사 왕이 다른 마음 없으시니 억류를 풀으소서 하시니 충숙왕(忠肅王)이 매우 아름답게 여겨 성균악정(成均樂正.從4品官) 초배(超拜.뛰어넘어 승진) 하셨다.

원(元)나라 개주수(蓋州守)가 사람을 보내어 예(禮)로 청하되(개주판관에 부임 할 것을) 충숙왕(忠肅王)은 고려 조정에 없어서는 안될 직책에 있어 보낼 수 없다 하였다.

악정(樂正)에서 전법(典法.刑曹 즉 법무부) 판도(判圖.戶曹 즉 재무부) 군부(軍簿.兵曹 즉 국방부) 전리(典理. 吏曹 즉 총무처와 내무부)의 네곳 중요 관직으로 전임되시고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중앙의정기관인 문하성(門下省)의 從4品官)로 선임되셨다. 영능(永陵·충혜왕)께서 王으로 있을 때 강원도(江原道)를 존무(存撫.일종의 민심 수습 역할)하라 명하니 당시 지으신 문집(文集)이 왈 관동와주(關東瓦注)라 한다. 두 번이나 전교(典校)를 배하였고 지전법사(知典法事.형조의 從3品官)로 계셨다.

충숙왕(忠肅王)이 복위하자 충혜왕(忠惠王) 때 요직에 있던 者는 다 물리쳤고 공 또한 직책이 갈렸는바 사람들이 말하기를 얻기는 自身의 힘이요 잃기는 친분(親分)으로 말미암았다고 하였다. 얼마 후 다시 기용되어 전법판서가 되었으나 시기하는 궁중벼슬아치들로 인하여 파직을 당하셨으나 永陵(忠惠王)이 복위하자 다시 전법판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금의 밀직사사(密直司事) 이공수(李公遂)등 33人을 취하시니 때에 어진 인사(人士)들을 얻었다 하였다.판서에서 감찰대부로 전임하셨다. 악정(樂正) 이상은 항상 관직을 겸하셨고 비록 헌부(憲府)의 長이라도 표전(表箋ㆍ임금에게 올리는 글)과 사명(詞命ㆍ임금이 내리는 글)이 많이 公에게서 나왔더라. 계미년(癸未年:1343)에 검교평리(檢校評理)로 출목상주(出牧尙州ㆍ상주의 지방관)하시니 순흥과 상접한 곳이라 대부인(大夫人)께서 고향에 계심으로 왕래 기거하사 효도가 극진하셨다. 갑신(甲申)년 봄에 충목왕(忠穆王)이 신정(新政)하실 때 제일먼저 불러서 의론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재직하시다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승진하시고 이듬해에 첨의평리(僉議評理)를 加하고 찬성사(贊成事)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를 역임하셨다. 정해(丁亥:1347)년 가을에 병환이 나셨고 흥녕군(興寧君)으로 봉(封)해지셨다. 집사자(執事者)가 유교를 기뻐하지 아니한 고로 파직되셨으나 중론이 비등하여 이해 겨울에 처음과 같이 복직이 되셨다. 무자(戊子)년 봄에 병환이 다시 생겨 이에 치사(致仕)를 빌었으며 여름 6월 초에 다시 흥녕군에 봉해지시고 품계는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고 21일에 부음이 들리거늘 王이 유사(有司)를 命하여 조상하고 시호(諡號)를 문정(文貞)이라 하였으며 백관(百官)이 회장하니 슬픔과 영화가 가위 무결(無缺)이라고 이르더라. 7월11일에 대덕산(大德山)에 폄하니 향년이 67이시다. 배위(配位ㆍ즉 부인)는 감천군부인(甘泉郡夫人) 문씨(文氏)니 검교 군기감(檢校 軍器監) 구(龜)의 따님이시다. 2남 1녀를 두시어 장남은 종기(宗基)니 보마배행(寶馬陪行) 수별장(首別將)인바 먼저 죽고 차남은 종원(宗源)이니 문과(文科) 급제하여 유비창(有備倉)의 부사(副使)가 되고 따님은 정량생(鄭良生)의 아내라. 두 아우가 있으니 보(輔)는 문과(文科) 급제하고 元나라 과거인 경사을유과(京師乙酉科)에 합격하여 요양성 조마(遼陽省 照磨·元나라의 요양지방 관리)를 제수 받았으며 어머님을 봉양하기 위하여 귀국하여 우리 나라 우대언(右代言·밀직사 正3品)이 되었고 집(輯)은 성균 좨주(祭酒)로 있었으나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공이 2弟를 가르침에 자신의 소생과 다름 없이 가르쳐 성인에 이르렀으며 그 아우들이 공을 어버이처럼 섬겼다. 우리 나라 제도에 의하면 3子가 등과하면 그 母에게 종신토록 녹(祿)을 주는바 공이 2弟와 과거에 오르고 또 형제가 원(元)나라 과거에도 합격하셨으니 이는 세상에 드문바로 공의 교양(敎養·기르고 가르친)의 힘이다. 공 마음가짐이 공정하시고 가정을 다스림이 근검하며 말씀은 편안한 느낌을 주고 꾸미지 않았으며 관에 있을때는 부지런하여 게으른 빛이 없었고 착함을 보시면 이를 칭찬하여 마지 않았으므로 좋은 평판이 많았고 惡을 보시면 피하여 가까이 하시지않는 까닭에 원망하는 소리가 없었다. 호를 근재(謹齋)라 하시니 그 뜻을 가히 헤아릴 수 있도다. 비문(碑文)에 가로되 수 하심이 아니고 연세 칠순(七旬)에도 미치지 못하셨으나 귀(貴)하심이 아니랴. 어진 제(弟)가 있고 자(子)가 있고 덕(德)이 있고 언(言·귀한 말씀)이 있으시니 비명은 과찬한 것이 아니고 오직 공의 장하신 묘(墓)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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