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국(高麗國) 급제(及第) 증봉익대부(贈奉翊大夫) 밀직(密直) 제학공(提學公) 묘표(墓表) 외후손(外后孫) 부윤(府尹) 오운(吳澐)

역학등제(力學登第)하여 기가(起家)하시고 드디어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비돈선사(肥遯善士·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선비)로써 후손에 관유하시니 이에 혁혁하게 창성(昌盛)하여 큰 문벌이 3백여년에 걸쳤다. 죽계(竹溪)는 그 거하신곳, 석(碩)은 그 휘요 밀직제학(密直提學)이 그 증작(贈爵)이다. 고(考)의 휘는 희서(希)요 조(祖)의 휘(諱)는 득재(得財)시니 근재공(謹齋公)께서 귀하게 되사 다 증관이 되시고 배위는 안씨(安氏)니 검교 군기감(檢校 軍器監) 성기(成器)의 따님이시다.

흥녕군(興寧郡) 대부인(大夫人)의 봉첩을 받으시고 네분 아드님을 두셨으니 헌(軒)은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이요 축(軸)은 문정공(文貞公)이니 즉 근재선생(謹齋先生)이요 보(輔)는 문경공(文敬公)이요 집(輯)은 순흥군(順興君)이시니라 문정공(文貞公)과 두 아우께서 모두 등과하시고 또 문경공(文敬公)은 元나라 과거에 급제하셨고 이에 백운동 문성공사(白雲洞 文成公祠)에 배향하고 문정공(文貞公)은 면면(綿綿)하여 가장 번성하시니 문간공(文簡公) 종원(宗源) 양도공(良度公) 경공(景恭) 정숙공(靖肅公) 순(純) 문숙공(文肅公) 숭선(崇善)을 낳으시어 삼수훈봉(三受勳封)하시고 오전문형(五典文衡)하시며 계세명경(繼世名卿)이라.

사부자(四父子)분이 잡수시던 우물을 사현정(四賢井)이라 하여 구리(舊里)에 작은 비석으로 표하고 액면(額面)에 일가충효우제(一家忠孝友悌)라 쓰여졌으며 청백의 풍모가 지금 애연(藹然) 함은 주선생(周先生) 세붕(世鵬)이 씀이라 묘(墓)는 병산(甁山)에 있어 정통(正統) 기미년(己未年)에 단갈(短碣)을 세움은 좌윤지자(左尹之子) 판사(判事) 질()이라 세월이 오래되어 단매무징(斷埋無徵·깨어지고 땅에 묻혀서 고징을 밝힐 수 없음)이더니 만력(萬曆) 임진년(壬辰年)에 11대손 덕린(德麟)이 탐지하여 고쳐 세우려다가 난리로 못 세우고 16年을 지내고 을미년(乙未年)에 풍기 영주 용궁 예천의 내외(內外) 운잉(雲仍 후손) 百여인이 치력(致力)하여 의론하되 옛 비갈이 비록 끊겼으나 각자(刻字)가 있어 매몰치 못하고 특별히 일석(一石)을 다듬어 사적(史蹟)을 새겨 길일에 묘(墓)도를 수리하고 좌편에 높이 세우니 덕린(德麟)과 함께 일을 관할한 사람은 호의(好義)라 아아 선조잠덕(先祖潛德)의 쌓아 올림과 여경지원(餘慶之遠)은 덕린(德麟)같은 추원지성(追遠之誠)이 없었다면 그의 현택(玄宅)의 방향을 모를뻔 하였더라. 종지(宗支)가 원방에 산재 하였음으로 거필(巨筆)을 얻지 못하고 탁식이라 무릇 자손(子孫)들은 더욱 무첨 숭조(崇祖)하기를 생각하여 이 도모를 기리 기약할 것인즉 금일 입석하는 뜻도 저버리지 아니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로다.

만력 정미 10월  일

외손 통정대부 장예원 판결사 오운(吳澐)짓다.

 

 

Copyright ⓒ2004  순흥안씨삼파종회 All rights reserved.